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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논개
기사작성 : 아브라함   2020-02-27 19:31
오페라 ‘논개’의 창작과정과 리허설의 에피소드
글/ 최천희(경남음협회장,
창원대 대학원출강)

1.오페라와의 첫 만남

나는 고등학교때 밴드부에서 혼을 전공하였지만 1977년, 당시에는 경남 도내에서 음악관련 학과가 있는 유일한 학교였던 경남대학교 음악교육과에 작곡 전공으로 입학하였다. 그리고 78년 11월 입대를 하였고 81년 봄에 제대를 하고 2학기에 복학을 했다.
그때까지 기악분야에는 관심이 많아 밴드나 관악합주단 그리고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단원으로 활동을 하였지만 성악분야는 관심이 적어 오페라라는 장르에 관해서 잘 몰랐다. 막연하게 오페라는 길고 지루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직접 오페라를 본적이 없었다.

내가 오페라를 처음 접한 것은 83년이었다. 그해 경남대학교 음악교육과에서 경남 최초로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제작, 공연하였는데 성악과 기악 전공생들은 필참이었고 작곡 전공생들은 합창이나 합주 중에 선택을 하게 되었다. 나는 합주를 선택하여 오케스트라의 타악기주자로 참여하였다. 내가 타악기주자가 된 것은 78년 제2회 MBC대학가요제에 경남대표로 “에루화”라는 그룹의 드럼주자로 참가하였으며 군대생활 동안 문화선전대의 드럼주자로 근무한 까닭이다.
아마도 1학기에는 오전수업만 하고 오후수업은 모두 파트별로 오페라 연습에 참여하였다. 여름방학 때도 학교 강당에서 연습이 있었는데 주역과 합창, 오케스트라가 모두 모여 총연습을 하였다. 2학기에는 수업을 아예 전폐하고 모두 강당으로 가서 연습을 하였다. 요즘의 상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역과 합창, 오케스트라가 만들어 내는 작업이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여 친구들끼리 대화할 때도 오페라에 나오는 레시타티보를 흉내 내며 서로 쳐다보며 낄낄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몇달 동안의 지독한 연습 덕분에 가사는 모르지만 처음부터 마지막부분까지 선율을 모두 외워버렸다. 오페라하면 떠오르는 것이 길고 지겹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만큼은 선율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의 경험이 내가 오페라를 작곡할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2. 유럽 유학생활 중에 본 오페라와 발레

대학 졸업 후 대학원 작곡과와 대학원 국악과를 차례대로 졸업하고 여러 대학에 출강 중이던 91년에 경남에도 오페라단이 창단되었다. 경남오페라단의 탄생이 그것이었으며 92년에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 창단 공연을 가졌다.
공연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단장, 지휘자, 감독, 출연자들이 선배, 동료, 후배들이어서 자연스럽게 연습과정과 공연을 지켜볼 수 있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창단 공연은 음악과 연출, 무대, 의상 등 모든 것이 빈약하여 많은 실망을 하였지만 경남에서도 오페라를 제작, 공연할 수 있다는 자부심은 대단했던 것 같다.
92년 12월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나는 나에게 경남오페라단의 고 강영중단장님께서는 “앞으로 경남오페라단에서도 창작오페라를 해야 할 것이니 최선생이 유학 중에 노력하여 귀국할 때 오페라를 1편 써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대답은 “예”라고 했지만 길고 지루한 오페라 작곡은 염두가 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바뀐 환경에 대한 적응과 입학 준비 그리고 공연의 비싼 입장료 때문에 오페라를 볼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그러던 중 당시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로 세계적인 작곡가로 알려진 폴란드 작곡가 구레츠키선생님을 만났다. 이로 말미암아 그와 함께 공부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서 폴란드로 거처를 옮겼으며 바르샤바 쇼팽음악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폴란드의 물가가 낮아 바르샤바 필하모니아홀의 콘서트와 바르샤바 오페라발레극장 입장료가 굉장히 저렴했다. 어느 달인가는 필하모니아홀의 콘서트와 오페라발레극장에 간 횟수가 18회나 되었다.

오페라발레극장에서 본 많은 오페라와 발레 중 기억에 남는 것 중에서 몇 가지를 든다면 오페라 “나비부인”이 생각난다.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해도 끝날 줄 모르는 지루함과 서양성악가들이 연출하는 일본스타일의 머리모양과 복장 그리고 게다를 신은 걸음걸이의 부자연스러움에 웃음이 났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되고 한국성악가들이 출연하는 서양오페라를 서양인들이 본다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오페라 “살로메”를 2회 보았는데 첫날의 주인공은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벗었다. 둘째날의 주인공은 아랫부분만 남기고 모두 나체로 공연하였는데, 외설과 예술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혼돈이 오기까지 했다. 과연 한국에서도 이 오페라를 이렇게 공연할 수가 있을까 하고 되뇌어 보았다.
폴란드 작곡가의 오페라는 참 재미있었다. 내용도 좋았고 아리아도 좋았다. 폴란드 오페라를 공연하는 날에는 학생들의 단체관람이 많았던 것 같았다. 무대 장치도 대단했다.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에서 떨어진 물방울 때문에 마당의 흙이 파여 있는 세심함과 그림인지 실제인지 헷갈리는 무대 배경의 정교함도 인상적이었다.

여러 편의 발레를 보았는데 그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공연은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발레단의 공연이었다.
1부의 클래식 발레를 보며 졸았다. 한국에 다녀온 다음날이라 시차적응이 안되었던 까닭만은 아니었다. 휴식시간에 집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입장료가 아까워서 2부를 보기로 했다.
2부는 모던 발레였는데 정말 멋있고 재미있어 시간가는 것이 아까웠다. 잠은 멀리 달아나고 발레가 이렇게 재미있고 멋있는 장르였는지 미처 몰랐다. 그리고 발레 “그렉 조르바”는 몇 번을 보았다. 볼 때마다 멋지고 재미있고 즐거웠다. 커튼콜도 정말 멋지게 연출하였다. 여러 번 본 중에서 한번은 오케스트라의 반주 없이 녹음된 음악을 사용하니 감동이 많이 줄어들었다. 오케스트라의 실제연주의 중요성을 새삼 느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꼭 한번 제작해 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아직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포기하지도 않았다.

3. 경남 지역에서의 첫 번째 창작오페라

95년 귀국을 하였다. 현대음악의 정보와 연주가 부족한 지역이었지만 합포만현대음악제를 시작하였고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분주한 생활을 계속 하던 중 99년 진주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위촉되었다. 재창단된 교향악단이라 체제정비와 연습 등 정신없는 나날들이었다. 새로운 작품을 쓸 겨를이 없었다. 특히 길고 지루한 창작오페라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 동안 경남오페라단은 강영중 단장님이 돌아가시고 우여곡절 끝에 2000년부터 정찬희 단장님이 경남오페라단을 맡으셨다. 한국의 오페라단을 책임지시는 분들이 모두 음악인이었던 반면 정찬희 단장님은 음악인이 아닌 전문 경영인이었다. 정찬희 단장님의 체제에서는 공연과 경영이 구분되고 체계적인 시스템 도입으로 오페라단이 안정적인 운영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공연 횟수도 늘려 창원에서의 공연에 이어 진주에서도 공연을 했다.

이때쯤 서울과 대구에서 창작오페라 열풍이 일었던 것 같다. 몇 편의 창작오페라를 보고나니 나도 오페라를 쓰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생겨났다. 그러던 중 2002년 10월, 경남오페라단의 진주공연에 참석한 나에게 정찬희 단장님이 창작오페라 위촉문제를 꺼내셨다. 내가 작곡료를 말씀드리니 오페라 제작에 많은 경비가 들어 작곡료는 줄 수 없다고 하시면서 이 지역에 계시는 교수님이 오페라를 쓰고 계시고 서울의 유명한 교수님들께 위촉할 수도 있는데 나에게 특별히 배려해 주시는 것이라 하셨다. 고맙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나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저는 이름도 없는 시골의 3류 작곡가이지만 작곡료를 받지 않고는 작품을 쓸 수 없으니 유명하신 분들에게 위촉하십시오” 라고...

이 일이 있고나서 1년 후인 2003년 10월 경남오페라단의 진주공연 때도 단장님과 다시 창작오페라 위촉에 관해 의논했지만 저번과 같이 “작곡료를 줄 수 없다.”라고 하셔서 작년과 같은 답변을 드렸다. 그런데 1달쯤 지나 단장님께서 나에게 전화를 해서 내가 원했던 작곡료를 지불하겠으니 작품을 시작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2004년 10월 경남오페라단 정기공연에 작품을 공연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참으로 기뻤다. 왜냐면 그때까지 경남에서 창작오페라를 작곡하고 연주했던 적이 없었기에 말이다. 경남 최초의 창작오페라가 될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감격스러웠다.

단장님께서는 2004년 10월 정기공연 때 연주하기를 원하셨지만 나는 양해를 구했다. 당장 공연하고 싶은 마음이야 말해 무엇하리... 그러나 의미 있는 작품이니 여유를 가지고 1년 동안 착실하게 작곡을 하고 이후 1년 동안 수정, 보완과 충분한 연습을 거쳐 2005년 10월 무대에 올리기를 부탁드렸다.

그때까지 몇 편의 창작오페라를 보았는데 시간에 쫓겨 급하게 만들어진 작품에 연습마저 부족한 작품들이 공연되는 것을 보았다. 공연 당일까지 성악가들이 악보를 외우지도 못하고, 무대 연습이 부족한 탓에 무대의 막 전환도 제대로 안되며 오케스트라 편곡과 연습도 형편이 없어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동안 최고의 연출과 무대, 의상 등에 의해 세련되고 검증된 모차르트, 베토벤, 베르디, 푸치니 같은 대가들의 오페라를 감상하던 청중들이 시간에 쫓겨 제대로 완성되지도 않은 이 땅의 작곡가들이 만든 작품들을 청중들은 어떻게 바라 볼 것인지 궁금했다. 이러한 이유로 내가 만약 오페라를 만들어 공연한다면 작곡과 연습에 충분한 시간과 열정을 가지고 임해야겠다고 다짐을 한바 있었기에 첫 창작오페라의 작곡과 연습에 2년간의 시간을 확보한 것이었다.

4.창작오페라 “논개”

본격적인 오페라 창작에 들어갔다. 주제와 제재 등 구성해야 할 요소들이 많았다. 밤잠을 설쳤다.

어릴 때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 아랑의 전설이 생각났다.
...조선시대 경상도 밀양 땅에 아랑이라는 사또의 예쁜 딸이 있었다. 아랑은 흠모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관가의 하인이 아랑을 좋아했다. 어느 날 하인은 아랑의 유모를 꾀어 밤중에 아랑을 영남루로 데리고 나오게 하였다. 유모는 사라지고 반항하는 아랑을 하인이 살해한다. ... 중략 ... 새로운 사또가 부임하면 죽어 나갔다. 그러던 중에 담력이 큰 사또가 부임한 첫날 밤 사또의 처소에 귀신이 나타났다. 아랑이었다. 복수해줄 것을 원했다. 범인의 머리위에 나비가 되어 나타나겠노라고...
아랑의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들고 싶었다. 과거와 현재, 이승과 저승, 선과 악이 공존하는 드라마틱한 소재였으니까. 그런데 나는 그때 진주시향의 지휘자였다. 그런 인연으로 나의 첫 창작오페라 소재는 진주의 논개로 결정되었다.

어릴 때 단칸방에서 나와 어머니, 동생들이 모두 같이 지냈다. 겨울에 밖이 추워 나가 놀지 못하여 심심할 때 다 같이 다리 뽑기 놀이를 하였다. 다리 뽑기 노래를 이렇게 부르면서...
...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진주 망건 또망건 ...
조선 말기 진주민란 때 부르기 시작하여 전국으로 퍼진 민요인데 나의 첫 창작오페라 “논개”의 시작부분에 차용하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경남오페라단과의 오페라 위촉 문제가 수월치는 않았지만 일단 결정이 되고난 후에는 모든 것이 파격적이고 일사천리였다.
연습과 지휘는 내가 맡고 오케스트라는 진주시향, 합창과 무용은 창원시립합창단과 무용단 그리고 단장님은 나에게 원하는 연출가가 있느냐고 말씀하시면서 서울에 있는 유명 여성연출가를 언급하셨다. 그런데 나는 나와 군대생활을 같이 한 모연출가를 추천하였더니 단장님은 즉석에서 내가 추천한 연출가를 섭외하기로 결정하시고 2005년 정기공연 “논개”를 위해 2004년 정기공연 “토스카”부터 연출을 맡기겠다고 하셨다.
요즘 가끔씩은 단장님이 언급하셨던 그 여성연출가가 “논개”의 연출을 맡았으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본다.

논개를 소재로 오페라를 쓰기로 결정하고는 논개에 관련된 여러 서적들을 읽고 나름 공부를 하였다. 논개의 흔적을 따라 이곳 저곳 다녀보기도 하고...
오페라 작곡에는 오페라 대본이 있어야 되는데 대본이 문제였다.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에 제대로 된 오페라 대본가가 몇이나 될지? 오페라 대본가를 만나기 위해 전국을 뒤져 수소문했지만 마땅찮았다. 그러던 중 우리 지역에 괜찮은 대본가가 있다고 하여 만나 의논해 보니 열의도 있고 아이디어도 좋았다. 그래서 그 대본가에게 내가 의도하는 바대로 대본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대본을 부탁하고 난 뒤에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논개는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오페라이니 최대한 역사에 근간을 두고 만들어져야 된다고 생각했고 자칫 사실에 소홀하여 역사에 누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논개에 관한 자료와 연구자들을 만나 공부해 보니 허점들이 나타나 수정, 보완하여 대본을 다시 써는 바람에 1달여를 소비하고 2004년 내내 작품을 썼다. 그리고 2005년에도 작곡된 작품을 수정, 보완하고 드디어 첫 연습일을 맞이했다.
경남오페라단에서는 작곡자보다 작품을 더 잘 이해하는 지휘자가 어디에 있느냐며 나에게 연습과 지휘를 맡겼다. 그랬기에 첫 연습일을 더욱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5.오페라 “논개”를 무대에 올리다.

내가 서양음악을 공부하고 유학을 떠나기 전에 다시 대학원 국악과에서 한국전통음악을 공부한 것은 내 작품의 정체성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나는 나름 한국전통음악의 계승과 발전 그리고 서양음악의 자주적 수용이란 차원에서 작품을 쓰기 때문에 나의 작품에는 한국전통음악적인 요소와 서양음악적인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오페라 “논개” 역시 한국적인 선율과 서양 현대음악적인 요소 그리고 국악기까지 첨가하여 만들어진 까닭에 경남오페라단에서는 첫 연습 때 무형문화재이신 전통가곡의 명인 조순자선생님을 모시고 연습에 임했다.
주역, 조역들과 인사를 나누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연습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국전통음악의 시조창 스타일의 첫 번째 테너의 아리아 부분에서 테너가수는 내가 원하는 소리를 내지 않아 나무라니 자기는 “지휘자가 요구하는 소리를 낼 수 없다.”라고 하였다. 내가 요구하는 소리는 한국적인 스타일을 원했고 테너가수는 서양 발성을 고집하고... 급기야 언성이 오가고 테너가수는 연습을 그만 두고 연습장을 뛰쳐나갔다.
그때 감수하러 오신 조순자 선생님이 단장님을 찾아뵙고 “작곡자는 한국적인 소리를 요구하는데 성악가는 서양의 스타일로 연주한다면 작품이 의도하는 그 맛을 낼 수 있을까요? 소리는 도구 즉 수단과 방법이지 목적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씀 하셨다.
연습장을 뛰쳐나간 테너가수가 단장님을 찾아뵙고 “이런 지휘자와는 같이 작업할 수 없다.”라고 하니 단장님 왈 “이 오페라를 연습시키는 그 지휘자는 지휘자 이전에 이 오페라의 작곡자이니 지휘자가 요구하는 대로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만 두어도 좋다”고 하셨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그 테너가수가 나를 찾아와 사과를 하였고 연습은 다시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내가 오페라 “논개”의 연습에서 성악가들에게 강조한 것은 정확한 가사 전달과 충분한 연습과 연구를 통해 악보에 나타나 있는 작곡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를 원했다. 물론 공연 2개월 전에 모두 암기는 기본으로 했다.
오페라에서 자막은 필요하지만 자막은 보조 수단으로 쓰여야 감상자들이 전체적인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그만큼 가사 전달은 중요하다. 한국의 음악과에서 한국어 딕션 수업시간이 개설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리고 성악가들이 작곡자의 의도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을 해야 서양 발성으로 노래하지만 한국적인 선율의 맛과 멋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으며 재창조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성악가들이 성실하게 연습에 임했던 결과 성악가들의 의견으로 선율의 일부를 수정, 보완하기도 했다. 물론 성악가의 입장에서 요구하는 바를 무조건 들어준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이 부분에서 음역을 낮추는 것이 좋겠다.”가 아니라 “이런 분위기에서는 이런 조(키이)로 해야 어두워진다.”든지 “이 부분에서는 반복을 줄여야 간결해 진다.”, “극적인 부분의 연출을 위해 카덴자적인 부분이 들어가야 된다.” 등등. 모든 것들이 논리적이어야 가능했던 일들이었다.
대부분의 창작오페라에서 지휘자는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디테일한 부분은 성악가들에게 맡기는데 나는 조그만 부분까지 내가 의도한 바대로 성악가들이 연주해 주지 않으면 야단을 치고 될 때까지 몇 번이고 연습을 시키니 많은 트러블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블 캐스팅의 경우 꼭 A팀을 칭찬하면 B팀이 불만이고 B팀을 칭찬하면 A팀이 불만이므로 오페라를 마치고 나면 어느 한쪽에게는 항상 욕을 먹는 것이 나만의 숙명일까??...

연습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연출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 동안 내가 경험한 연출자들의 공통점은 악보를 정확하게 읽고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음악적인 부분들을 충분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대본을 보고 나름 연출의 아이디어를 찾는 것이었다. 한국의 연출자들은 기존의 오페라 연출은 그런대로 잘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 동안 자신이 공부한 것과 많은 경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지만 선례가 없는 창작오페라의 경우 연출자는 작곡자가 시간과 공간을 배려하며 만든 작품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오페라 “논개”에서 주역인 황진장군의 죽음을 활복자살로 비장하게 마감하자는 연출가에게 나는 말했다. “나비부인도 아니고 왠 일본스타일이냐”고 “논개는 남강과 뗄 수 없는 것이니 남강에서 해결점을 찾아야 된다” 라고 하였다. 논개하면 남강이 키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소나기하면 징검다리가 떠오르듯이... 그리고 나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파란색으로 상상했다. 남강을 생각하며...

드디어 공연...
감개무량했다.
2층 객석 양쪽과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시작을 알리는 트럼펫의 팡파레에 짜릿했다. 이어 합창과 무용이 어우러지고 주역과 조역들의 열창... 커튼콜까지 완벽하게 마쳤다.
창원공연에 이어 진주공연까지 성공적이었다. 언론에도 좋은 평들이 실렸다. 그 중에서 모 일간지에 기고한 평론가의 리뷰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유연한 전개, 집중도·이해도 높여…세계적 작품 가능성 발견

창작 오페라의 새 지평을 열어 보인 오페라 <논개>(29일 성산아트홀)는 아마도 국내 창작오페라 가운데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우수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작품을 다루는 능숙한 솜씨와 극적인 전개가 뛰어나 관객을 하나로 몰입시켰다. ... 중 략 ...

역사물 오페라 하나에 20억 원 이상 투자하고도 아직도 암중모색인 작품에 비하면 이번 <논개>는 흡사 골프의 홀인원 같은 흥분을 느끼게 한다.
누가 이 작품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역사에 남을 작품으로 완성도를 높일 것인가, 이것이 과제로 남을 뿐이다.

그리고 공연을 마친 이후 오페라단, 언론, 경남도의 관계자들이 모여 논개의 재공연을 위한 간담회가 개최되었다.

6. “논개” 그리고 그 이후.

첫 연습에서 트러블이 있었던 테너가수는 나중에 오페라 “논개”의 홍보대사?가 되었다. 자기가 리더로 있는 대구의 성악 연주단체와 대구오페라하우스의 “우리 오페라 우리 아리아” 시리즈에서 논개가 공연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출강하는 모 대학의 한국오페라 시간에 논개의 아리아로 수업을 진행하는 열성홍보맨이 되었다. 그리고 2008년 오페라 “논개”의 재공연과 내가 작곡한 오페라 “대장경”의 2010년, 2011년 공연에서도 주역을 맡았다.


최천희
경남대 음악교육과 졸업
계명대 대학원 작곡과 졸업
영남대 대학원 국악과 졸업
폴란드 바르샤바 쇼팽음악원 작곡과 졸업
러시아 모스크바 그네신음악원 지휘과 졸업
경남오페라단 위촉 오페라 “논개” 작곡, 지휘
315아트센터 개관 기념 오페라 “소나기” 작곡, 지휘
대장경 천년 기념 오페라 “대장경” 작곡, 지휘
부산시 사하구 위촉 오페라 “윤흥신” 작곡, 지휘
진주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현)경남음악협회장
창원대 대학원(지휘전공)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