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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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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지휘자 (홍준철)
기사작성 : 아브라함   2019-04-25 15:45
名 합창 지휘자들의 해독법 탐구(39)
지휘자 홍준철 편

대담/ 김규현(前 한국음악비평가협회 회장, 작곡가)

1. 먼저 합창지휘자가 된 동기를 듣고 싶고 합창단 음악이있는 마을을 창단한 동기와 목적, 그리고 활동을 듣고 싶습니다.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성가대원 시절, 지휘자였던 이건용 선생님을 보고 나도 지휘자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결심은 천둥번개와 같이 나를 뒤 흔들어 버렸습니다. 그분의 지휘는 당시 저에게는 환상적이었습니다. 그 많은 성부를 어떻게 다 보고 들을 수 있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파트별 사인을 주는지 놀랐으며 인품 또한 맑고 온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홀려 늦은 나이에 음악대학에 입학을 하고 무조건 지휘를 시작했지요. 지휘는 지휘하는 게 가장 빠른 배움의 지름길(leaning by doing)이었긴 했지만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었고, 지휘법에 목말라했으며, 누구보다도 잘하고 싶어서 절치부심하였습니다. 전문도서와 연주회와 영상, 세미나를 통해서 부족한 점을 하나씩 깨쳐나갔지요. 저는 그렇게 수영장에서 강습으로 배우는 수영이 아니라 갯가에서 수영하며 하나씩 터득해나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십 수 년을 지내면서 조금씩 지휘자의 그릇이 만들어 졌고 나름의 방식도 터득하게 되었을 때 합창단 음악이있는마을을 창단하게 됩니다.

199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이강숙 초대총장, 작곡가 이건용 선생님과 만날 기회가 자주 있었는데 한국 음악계에 대한 허심탄회한 토론을 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주제는 우리의 악계가 한국창작곡에 대한 무관심과 부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론가인 이강숙 총장은 아무리 창작곡을 연주해야한다고 이론을 설파해도 악계는 바뀌지 않았다는 겁니다. 작곡가 이건용 선생님 역시 창작곡을 전문으로 하는 합창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고 마침 지휘자인 홍준철까지 있으니 이론에서 실천의 장으로 전환하고 단장 이강숙, 음악감독 이건용, 지휘자 홍준철로 조직을 구성하여 창단하게 됩니다. 기업이나 후원자 없이 오로지 시민합창으로 시작하였습니다. 합창단의 목적은 기존 창작합창곡을 발굴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위촉하고 연주하는 것이 목적이었죠. 아마추어 시민합창단이 22년 동안 해왔습니다. 그것도 아주 잘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국의 합창곡을 개발하는 음악적 목적을 가진 일본의 오쿠보 혼성합창단, 타이페이 챔버 콰이어, 필리핀 AILM코랄과도 교류 할 수 있었고 그들의 작업과 비교하면서 점점 더 창작곡에 대한 열정과 노하우들이 생겨났습니다. 그간 함께 작업한 작곡가들은 이영조, 이건용, 김대성, 신동일, 류건주, 김성기, 노선락, 안효영, 강은수, 한아름, 양이룩, 강현나, 류형선이 있고요, 작품을 발굴하여 연주한 작곡자로는 김희조, 나운영, 이문승, 강준일, 황성호등이 있습니다. 작품을 위촉한 외국인으로는 F.F.F. Felliciano, J. Baez가 함께 하였습니다.

창작곡에 매진한다고 해서 서양음악 연주를 안 한 것은 아닙니다. G. P. da Palestrina , G. Fare , W. A. Mozart. J. Haydn , L. van Beethoven , C. Gounod , J. Verdi 등을 연주했고 소품들도 연주하였습니다. 또한 일본합창음악, 중국합창음악, 필리핀 합창음악들의 진수도 찾아 연주하였습니다. 이는 지구촌 합창음악을 경험함으로서 표현 양식을 배우고 그 자양분을 우리 창작곡 연주를 풍성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에서 우리는 한국의 창작합창곡이 서양합창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다는 자부심도 얻었습니다. 왜 창작곡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찾을 수 있었고요. 하여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합창으로, 그리고 세계로>라는 슬로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죠. 창작음악은 길이 없을 것 같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으면 무궁무진한 광맥이 이곳에 있음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합창단 음악이있는마을은 기획과 연주력을 바탕으로 한국작곡가 한명의 작품으로만 정기연주회를 하는 방식까지 발전하였습니다. 이 공연에는 모든 예산과 정열을 쏟아 부습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며, 24채널 멀티 녹음을 하고 아르테 TV로 중계되게 기획합니다. 이는 새로운 창작품이 가장 좋은 환경, 한국공연의 심장에서 초연되게 한다는 의도입니다. 연주 후에는 이를 음반으로, 영상으로 공개하고 유투브를 통해서 세계로 송출해 왔습니다.

2. 어느 전문 합창단보다도 국내 작곡자들과 작업을 많이 하고 그들의 창작곡들을 많이 연주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세계 명작들보다 국내 창작곡을 연주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국내 창작곡의 미학적 가치는 무엇이던가요?

이 질문은 방송이나 잡지, 신문 인터뷰 때에도 똑같이 많이 받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국내 창작곡을 연주하는 특별한 이유’라는 질문이 질문 자체로 성립이 되나 라고 반문하였지요. 한국에 사는 한국 사람에게 ‘ 세계 공통어의 위상을 가진 영어보다 한글을 사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인간이 한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언어가 있는데 우리는 이를 모국어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에게는 한글이 모국어입니다. 영어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특별히 배워야 습득할 수 있는 외국어입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모국어적 음악과 외국어적 음악이 있습니다. 한글은 다행히 정체성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음악은 전통음악이라는 범주로 줄여놓고 그 자리를 외국어적 음악인 서양음악이 모국어적 음악으로 차지하게 됩니다. 1885년부터입니다. 그래서 앞의 질문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겁니다. 저는 한국의 모국어적음악을 다시 배우고 찾는 작업을 뒤늦게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창작곡을 위촉하고 연주해 왔습니다. 제가 쓴 칼럼 <왜 창작곡을 연주해야 하는가?>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한때 유럽음악의 변방 국가였던 독일이 하슬러,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등등의 작곡가가 만든 작품을 거치면서 문화선진국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우리의 작곡자들의 작품이 당당히 세계에 퍼지고, 우리의 연주자들이 높은 개런티를 받고 초청받아 해외 연주를 하고, 외국의 학생들이 우리나라 음악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오고, 우리는 국내대학만 나와도 세계적인 음악명문대학을 나온 음악가가 되는 그런 문화선진국이 되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진실로, 진실로 그러고 싶다면 우리 작곡자들에게 창작곡 위촉하고 연주를 거듭해야 한다. 그래야 세계적인 작곡가가 나오는 것이고, 다른 나라 사람은 흉내도 못내는 높은 예술적 경지의 작품들을 품은 대한민국이 되는 것이며, 선진 문화시민이 되는 것이다. 음악의 역사는 작곡가의 역사라는 것을 잘 알지 않는가? 영국이 그랬고 독일이 그렇고 프랑스가 그랬고, 러시아가 그랬고, 미국이 그렇지 않은가? 왜 우리는 그들을 우러러보고 숭배하기만 하였지 우리가 그렇게 되려고 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그들을 복사하고 소비하려고만 했지 우리를 생산하려하지 않는가?

우리는 언제나 음악문화를 물려줄 후세대를 생각해야합니다. 서양음악의 전도사 역할은 이미 차고도 넘칩니다. 우리를, 그리고 지금, 여기를 노래할 곡들을 만들고 연주해야 하는 때가 분명히 올 것입니다. 서양음악 언저리(사실 그것도 독일음악과 미국음악을 뱅뱅 도는)에 아무리 있어봐야 결국 허할 뿐입니다. 나중에 정신 차리고 한국음악을 찾을 날이 분명이 옵니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저는 한국창작음악을 중심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연주회를 위한 선곡을 할 때 선곡기준은 무엇이고 늘 염두에 두는 주안점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가사(시)를 음미해봅니다. 합창곡은 좋은 가사가 있어야 좋은 곡이 창작될 확률이 큽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교가들이 수준이 매우 낮은 이유가 가사에 있습니다. 산과 강의 정기 운운하는 매력적이지 않은 가사로는 더 이상의 곡이 나올 수가 없을 겁니다. 저는 시를 먼저 봅니다.

두 번째로는 이 시를 얼마만큼 음악으로 잘 들어내고 있느냐를 봅니다. 시를 음악으로 번역했을 터이고 그 표현이 매력적인가를 봅니다. 좋은 작품의 경우에는 이 둘의 결합이 물리적 만남이 아닌 화학적 반응을 넘어 생물학적 진화를 하고 있습니다. 원래 음악과 시가 하나였던 작품처럼 보입니다. 언어의 내공이 가득한 합창작곡자는 가사와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을 잘 해내는 작곡자입니다. 실력이 딸리거나 겉멋들은 작곡자는 이 부분에서 차이가 나지요. 가사와 음악이 결합되지 못해서 빠질 이처럼 덜렁거립니다. 예컨대 시는 잔잔히 내면의 기쁨을 말하고 있는데 별다른 이유 없이 음악은 f로 과장하면 그건 삼류거든요.

세 번째로 그렇게 완성된 작품이 우리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느냐를 봅니다. 이는 여러 번 반복해서 불러봄으로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임상실험을 통해서 검증되는 것이죠. 보통의 작품은 머리에 남지만 훌륭한 작품은 가슴을 관통합니다. 또한 두고두고 연주해도 그 여운과 맛이 남는 작품이 좋은 작품입니다. 예컨대 Palestrina, Bach 작품에서 느끼는 감정 말입니다. 부르고 또 불러도 또 부르고 싶은 중독성 작품들이 좋은 작품이지요. 한국 창작음악에도 이정도 되는 작품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네 번째는 시대정신이 있느냐를 봅니다. 한국의 자연을, 역사를, 문학을, 사람을, 사랑을 노래하는 가를 봅니다. 물론 이런 것 없이도 단순한 미의 추구만으로도 좋은 작품이 있습니다만 제 개인적으로는 좀 더 시대정신이 있는 작품을 선호합니다.

4. 대부분 국내 작곡자들이 생존해있어 작품 연구는 편리할 것 같습니다. 작품 안에 내재된 무엇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곡을 어떤 방식으로 연구하는지 그 과정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생존해있는 작곡자들의 작품연구는 편할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작곡자도 한 성격하는 분들이니까요. 의견대립을 넘어 불화로 발전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음악가들은 남이 보면 별것 아닌 것 가지고도 목숨을 거는 순박함(?)이 있거든요. 특별히 어느 부분을 생략하면 좋겠다는 의견은 전쟁수준으로 갈 위험이 있습니다.

저는 곡을 처음 받으면 조용한 시간을 정해놓고 눈으로만 봅니다. 그냥 천천히 읽어 내려갑니다. 잘 느끼지 못하는 부분은 표시만 해놓고 그 다음을 보지요. 그렇게 반복해서 봅니다. 앞서 이야기 한 대로 가사, 음악의 결합, 가슴을 울리는지 또 시대적 관점이 있는지를 살펴보지요. 그런 다음 각 파트를 개별적으로 불러봅니다. 음역은 어떤지, 노래하기 편한지, 가사의 발음과 표현은 좋은지를 봅니다. 이렇게 해보면 연습할 때 파트별로 어디를 틀릴지가 보입니다. 또한 어디를 강조해야 할지, 소리는 어떻게 낼지가 보입니다. 반주도 눈으로 보면서 전체 느낌을 잡아갑니다. 지휘의 예비박도 미리 표시 해두고 변박의 경우에는 박자도 잘 보이도록 상단에 크게 적어 놓습니다. 가사의 발음도 유의해서 보는 때도 이때입니다. 복합박자는 리듬을 하나씩 분석해서 Beating을 어떻게 해둘지 표시합니다. 필요하면 letter도 만들고 연습 때 해줄 말들과 화성, 리듬, 음정공부도 해둡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작곡자의 의도를 느껴갑니다. 음 하나 하나를 한 땀씩 지었으니 저도 눈으로라도 그걸 보려하지요.

그 정도 되면 연습계획을 잡습니다. 어느 곡을 먼저 연습할 것인가?, 어떻게 연습하는 게 효과적일까? 어떤 감정으로 노래할 것인지 등등 이렇게 1차 완성을 해놓고 이후 연습 때 까지 반복해서 봅니다. 앞서 분석한 내용이 틀렸거나 바뀌는 경우도 있고 해석의 방향을 다르게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악보를 오래도록 반복해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엔 어렵지만 반복의 힘은 무섭고도 위대한 것이어서 아무리 어려운 악보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을 째려봅니다. 세이지 오자와가 말한 방법인데 계속 째려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스르륵 이해가 됩니다.

5. 고전 전반기 이전 시대는 연주기호(tempo, dynamic, expression mark 등)가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기호가 없을 경우 무엇을 보고 어떻게 연주기호 설정을 하는지 알고 싶고 기호가 있을 경우 그 기호를 얼마나 어떻게 반영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성공회교회를 통해서 서양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을 깊게 연주해본 경험이 있는데요. 특별히 G.P. da Palestrina의 작품에 꽂힌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교회음악이 Palestrina 음악이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저는 Palestrina 학파였습니다. 그러면서 L. T. Victoria, T. Tallis, W. Byrd, Josquin de Prez 등의 작품을 지휘하기도 하였는데 이들의 작품에는 연주기호가 없습니다. 후세대 편집자(특별히 일본판 악보)들이 연주기호를 불필요하게 첨가하면서 해석까지 참견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 중 하나 입니다.

연주기호가 없는 것은 처음에는 매우 답답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특별히 tempo가 없는 악보는 불편하겠지요. 답은 의외로 쉬운 곳에 있습니다. 연습해보면 됩니다. 저는 ‘음악은 생명체다’라고 여기는 지휘자입니다. 즉 나름의 DNA가 있고 연주가 시작되면 살아서 자신의 삶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죠. 연주기호가 없어도 반복된 연습을 통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각자의 모양을 찾아간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곡을 ♩=60으로 연주하면 긴장의 끈이 떨어지고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 곡은 연주자 자신에게는 있어서만큼은♩=60의 곡이 아닙니다. 70, 80, 90으로 연주하면서 자신만의 적당한 tempo를 찾으면 되는 것이죠. 그 tempo가 적당하면 되는 겁니다. 그럼 연주하는 개인마다 다 달라지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고요? 달라지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한 것입니다. 더구나 악보에 연주기호를 적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다름을 포용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연주자에게 자유의지를 주는 것이죠. 얼마나 멋있습니까?

기호가 있는 곡들도 저는 때때로 그대로 연주하지 않습니다. 그 기호가 편집자의 기호이면 말 할 것도 없고 작곡자가 써놓은 기호라 할지라도 내안에서 이유 있게 인정되지 않으면 더 적당한 기호로 바꾸어 버립니다. 어떤 부분은 cre를 dim으로 바꾸어 연주 한 적도 있습니다. 지휘자의 입장에서 보면 작곡자의 생각을 존중해주는 것은 상식적으로 옳습니다. 그렇다고 내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음악의 상도 무시 할 수 없습니다. 곡 해석에 관한한 작곡자가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고요. 오히려 충분한 이유가 있는 이 다름이 음악의 해석을 훨씬 다양하고 풍성하게 해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6. Rehearsal technique을 듣고 싶습니다. 연습과정에 비중을 두고 강조하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연습시키는지 그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연습된 곡이 어떤 상태가 되었을 때 무대에 올립니까?

연습은 작품에 대한 해석의 상을 실현시키는 시간입니다. 작곡가가 원하는 해석이 있을 터이고 단원들 역시 연습을 통해서 각자 다른 음악의 상을 그리고 있는 게 정상입니다. 지휘자는 이 사이에서 강력한 자신의 상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상이 존재하면서 시작하는 것이지요. 물론 중심에는 지휘자가 있습니다. 제 경우, 작곡자와는 지휘자-단원간의 연습이 진행되어 어느 정도 일치된 상을 가진 후에 만납니다. 이미 악보를 통해서 작곡자가 원하는 점을 많은 부분 알 수 있으니까요. 작곡자의 만남은 단원들도 포함됩니다. 폭넓은 의견을 듣고 대화하고 토론해서 조정합니다.

연습 시간 배정은 스트레칭, 발성으로 시작하고 전반에 새로운 곡이나 에너지를 많이 쓰는 곡을 집중해서 연습합니다. 그다음 휴식과 간식이 있은 후에 광고를 하고 후반부 연습에 들어가지요. 후반부에는 이미 연습한 곡들의 깊은 해석을 위해 연습합니다. 전반부 보다는 쉽습니다. 마지막 곡은 완성도가 있는 것으로 선택하는데 노래하는 기쁨, 성취감을 위해서죠. 시간도 전반부 보다는 짧게 배정합니다.

곡의 연습은 처음 연습이라면 난이도 있는 작품은 중간 중간 어려운 리듬과 음정 부분을 설명하거나 간단한 연습을 한 후 처음부터 끝까지 틀리고 부족하더라도 불러봅니다. 그러면 곡의 성격이나 큰 틀을 잡아 갈 수 있죠. 그다음 가장 어려운 부분, 가장 힘든 부분부터 연습합니다. 인간의 집중도는 늘 한계가 있는 것이니까요. 또 되도록 악보의 후반부터 역으로 올라오면서 연습합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해봅니다. 이렇게 연습하기 위해서 악보에 letter를 만들어 단원들과 공유합니다. 이 letter는 곡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도 요긴하고 또한 감정 선을 유지시키는 지도 같은 역할을 해줍니다. 곡을 외우는 것은 길을 외우는 것과 같은 방식인데 letter가 큰 도움이 됩니다. 어려운 음정과 리듬부분은 미리 지휘자가 사전에 연습 방법을 만들어 준비해 둡니다.

부분 연습이 어느 정도 되면 가사의 발음과 표현에 집중합니다. 실은 이 시간이 오래 걸리지요. 어떤 느낌으로 부를 것이냐를 강조하는 시간입니다. 예컨대 슬픔의 표현도 내면으로 흡수되는 잔잔한 슬픔이 있고, 밖으로 표출되는 통곡과 같은 슬픔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중간급 슬픔도 무수히 존재하겠지요. 이는 가사를 곱씹어 보고 전후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의 강도로 노래 할 것이냐가 점차 정해집니다. tempo가 이를 위해 중요하지요. 슬픈 곡은 느릴수록 감정선이 진해지기 마련이니까요. 이 연습과정을 통해서 지휘자가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단원과 지휘자가 한 목소리를 내어야 하니까요. 설득하고, 설득되는 시간입니다. 지휘자가 신뢰를 잃은 사람이라면 여기서부터 어려워집니다. 객원 지휘의 한계도 대체로 여기서 막히고 말지요. 또한 이 지점은 자신을 표현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단원의 음악 기초재능을 포함하여 예술적 끼가 발동되어야 하고 단원 간 내면의 기운이 공유되는 등 고차원적인 단계입니다. 막장터널 끝에서 더 갈수 있느냐 못 가느냐의 기로이기도 합니다. 발전은 더디고 시간은 오래 걸립니다. 또 어느 순간 아무리 연습해도 한치 앞도 못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지휘자는 이 고독한 압력을 이겨내야 합니다. 고통의 벽에서 수도승처럼 발버둥 치다가 연주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연주는 언제나 완벽하지 못합니다. 소설가 조정래는 ‘ 50년 글을 써도 ...늘 무능함을 탄식하는 제례를 치른다.’라고 했습니다. 연습과 연주도 이와 같습니다.

7. 그 동안(20년 넘게) 국내 작품 초연을 많이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작곡 연주를 통해 해석과 논리와 표현 접근의 노하우를 갖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국내 창작곡 연주 시 외국곡과의 해석적, 미학적, 표현적 접근의 상이점은 무엇이 있던가요? 창작곡 연주법이나 해석법 논리를 외국곡과 비교해서 말씀해 주시죠.

같은 씨를 뿌려도 미국과 한국에서 자라는 식물의 모양이 다를 겁니다. 기후와 땅의 성질, 농사 짓는 방법, 농부의 마음과 연관 있다고 봅니다. 음악도 이와 같아서 같은 Bach 작품을 연주하더라도 독일에서 한 연주, 미국에서 한 연주, 한국에서 한 연주가 다를 것입니다. 신체의 구조나 언어로 인한 발성 환경의 차이, 그리고 생각의 차이나 사회적 분위기가 다르니까요. 저는 달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다 똑같으면 누가 음악하고 듣겠어요. 다 다르니 반복하는 매력이 있지요. 한 연주자가 동일한 곡을 연주해도 연습 때와 연주가 다르고 오늘 연주와 내일 연주가 다른 게 음악이니까요.

연주가 이러할진대 당연히 한국 작품은 외국 작품과 많은 차별성이 있습니다. 우선 가사가 지닌 뉘앙스가 있어요. 자음과 모음을 발음하는 위치도 다름으로 해서 느낌도 다르죠. 음악어법, 리듬, 프레이징, 다이내믹도 다릅니다. 예컨대 라는 가사로 만들어진 곡을 연주한다고 하면 Gregorian chant, W. Byrd, W. A. Mozart, C. Saint-Saens의 작품이 다 차별성을 가지지만 크게 범주를 정하면 유럽음악 풍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용의 는 이 큰 범주를 벋어나는 곡입니다. 우선 리듬의 형태부터 느린 굿거리장단이 숨어 있고요 한국 전통적인 춤사위가 은근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흐름의 방식으로 보면 서양의 곡들은 바닥을 정비한 개울을 지나는 소리가 난다면 이건용은 작은 돌들과 큰 돌들에 부딪쳐 흰 거품을 내며 여울을 지나는 소리이지요. 또한 음정의 경우에도 서양음악은 정확한 피치를 내는 것이 해석에 도움이 된다면 한국합창음악은 어떤 음은 1/4음정도 낮게 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다른 예로는 안효영의 를 들고 싶습니다. 이 곡은 겉보기에는 성양음악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식 깊은 탄식, 즉 한이 스며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없는 것 같지만 한국전통 발성 ‘흰소리’로 표현해야 할 부분도 있고요. 그러다 보니 서양의 벨칸토 가지고는 맛을 내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민요나 판소리나 정가의 음색을 사용해야 하는 부분도 있고요. 꾸밈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양의 꾸밈음은 수직적으로 음정이 표현 되지만 한국의 꾸밈음은 수평적으로 눌러 표현해야 합니다. 현악기 줄을 약간 눌렀다 펴면서 나는 ‘농현’ 방식을 써야 할 때도 있지요.

이밖에 3/4박의 곡이라 하더라도 서양은 왈츠나 미뉴엣, 샤콘느를 연상시키지만 한국음악에서는 ‘중모리’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고 음계로는 강원도의 ‘메나리’나 남도의 ‘계면’ 등이 서양과 사뭇 다른 다릅니다. 2대3 리듬이라 부르는 Hemiola(헤미올라)를 보더라도 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양음악은 르네상스 시대 음악부터 Hemiola 기법이 J. Rutter 같은 현대 음악까지 자주 등장 하는 바 한국의 Hemiola인 ‘엇몰이 장단’과는 그 표현방식이 상이합니다. 서양의 그것은 반복되는 동일 리듬을 변형시켜 변화를 준다고 하면, 한국의 Hemiola는 흐르다 멈춘 느낌으로 연주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발성은 발음에 기초합니다. 서양의 언어는 라틴어를 뿌리로 갈라지는데 발성에 있어서는 ‘아’발음이 그 중심을 이룹니다. 하지만 한국어는 ‘이’발음에 중심이 있습니다. 외국 사람이 한국말 하면 이상하게 들리는 이유입니다. 민요나 판소리는 ‘이’발음에 있고 그 소리를 한국음악에서는 진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서양발성으로 소리 내는 것은 가성이라고 규정하고요. 서양의 가성은 falsetto라 하여 완전히 뜬소리입니다. 국악에서는 ‘흰소리’가 가장 가까운 방식입니다. 다만 합창에 있어 한국어를 ‘이’발음에 너무 치우치다보면 공명이 풍부해지지 않습니다. 하여 모음은 ‘아’로 조금 가고 자음을 ‘이’발음 쪽으로 내면 한국어 발음의 자연스러운 소리를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자음의 강조도 있습니다. ㅅ, ㅂ, ㅍ, ㅊ, ㅎ의 발음은 강하고 정확하게 내야합니다. 파열음을 내야하는 ㅍ, ㅊ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컨대 ‘평화’라는 발음은 소리내기 어렵습니다. 외국인이건 한국인이건 말이죠. 자신은 평화라고 발음 하지만 들리는 건 ‘병화’ 또는 ‘영와’로 들리기 십상입니다. 부끄럽게도 이 분야는 선행 연구가 별로 없습니다. 외국어 발음은 잘하면서도 한국어 발음은 한국인이 더 나쁜 이유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한국어로 노래를 하는데 한국 사람이 못 알아 듣는 아이러니가 한국에 있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나름대로 여러 실험을 통해서 한국어 발음과 발성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지만 충분히 과학적이거나 논리의 바탕을 두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한국합창계의 주요 과제라고 여겨집니다.
8. 작품해석을 주관적 해석을 하십니까? 객관적 해석을 하십니까? 아니면 절충을 하십니까?

해석을 객관적으로 한다는 말을 저는 믿지 못합니다. 저는 물론 주관적입니다. 예술은 객관적인 분야가 아니니까요. ‘지극히 한국적인(주관적인)것이 세계적인(객관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모든 음악은 나의 가슴을 통해서 수렴되고 방출된다는 오만한(그러나 정당한) 믿음이 있습니다. 몇 해 전에 W. A. Mozart의 Requiem(죽은 자를 위한 진혼곡)을 연주할 때 후반의 봉헌 곡인 Hostias agimus tibe(당신에게 예물을 바칩니다)의 속도를 매우 느리게 연주한 적이 있습니다. 보통 ♩=70~90의 속도로 연주하는데 그러면 연주회를 위한 음악이 된다는 점에서 마뜩치 않았습니다. 그건 예물을 무릎 꿇고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신에게 정성을 다해 바치는 예전음악을 기초로 한 것이었거든요. 특별히 곡 중간 중간 상승하는 느낌의 전조는 이런 모습을 더욱 강화하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52정도 까지 늦추었습니다. 또한 다이내믹도 p는 pp로 f는 ff로 좀 더 과장하였습니다. K. Bohm이나 E. Gardner, H. von Karajan, L. Bernstein 등의 음반도 이때 확인 해보았습니다. 다들 저처럼 늦게 연주는 안하더라고요. 그러나 저는 tempo로 연주했습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근사한 해석이었습니다. 모차르트도 그리 생각했을 것이라는 확신까지 있었습니다. 느렸지만 충분히 긴장감을 유지 시킬 수 있었고 작곡자가 표현하려는 봉헌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었으니까요.

또한 이건용의 대작 <예수그리스도의 수난>을 연습 할 때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군중들의 합창이 느린 굿거리장단이었는데 작곡자는 ‘가난한 민중의 환호’로 해석하고 싶으니 속도를 빠르게 하고 표현도 거칠게 하자고 주문하였고 저는 ‘왕을 맞는 기쁨’으로 해석하여 궁중음악처럼 단아하게 하고 싶다고 주장하였지요. 작곡자와 논쟁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지휘자가 포기하고 작곡자의 의도대로 연주하긴 했지만 녹음한 것을 지금 들어도 내 주장을 관철 시켜야 했다는 생각입니다. 독선이지요. 그러나 지휘자는 그 독선을 믿는 게 운명입니다.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는 직관을 믿는 고집이 있어야 자신의 색깔이 있는 독립된 지휘자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도 ‘ 배워라 그러나 배반하라’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제자는 선생의 아바타나 복제품이 아닙니다. 독립된 예술가로 크려면 선생과 똑 같이 하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건 아류라고 하는 것이죠.

9.창작곡 초연은 그 연주가 해석법이나 연구의 한 기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지휘자들의 능력에 따라서 다를 수 있기는 합니다만 완결성 있는 연주나 해석은 어떻게 연주해서 만든 음악이고, 가장 합리적이고 최고의 음악을 갖춘 최고의 합창음악은 어떻게 연주해서 만든 음악이라고 보십니까?

창작곡 초연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에 낮선 음악을 소개하는 자리이니 연주가 감동스럽지 않으면 다시 연주되지 못하고 언제 다시 열어 볼지 모르는 망각의 창고에 쌓이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그런 곡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곡의 팔자를 정하게 되는 지점이 초연자리입니다. 또한 이후 다시 연주될 때 찾아 볼 수 있는 <선행 작업>이 되느니 만큼 충분히 그 곡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들어나도록 혼신을 다 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우선 연습을 오래합니다. 초연 연주는 정기연주회라면 주 1회 연습이니 최소한 1년 정도를 연습 기간으로 잡습니다. 저는 많은 곡을 연주하는 것을 중요한 덕목으로 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깊이 있게 연주하는 것을 최고로 치는 편입니다. 또한 음악의 완성된 연주는 없다고 앞서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그 길로 가는 중에 연주되는 것이죠. 연주자는 곡에서 울어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모두 발현되게 하고 그것이 작곡자의 노래뿐만 아니라 연주자 자신의 노래가 될 때 까지 부력을 견디며 음악의 깊은 바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과정을 지나고 무대에 올라 노래하면 놀랍게도 관객의 노래로 전이되는 순간을 느낍니다. 결국 최상의 연주는 작곡가, 지휘자, 합창단원, 관객까지 공동의 노래로 느끼는 연주인 것입니다. 나의 노래가 너의 노래로 변하고 결국 우리의 노래가 되는 것이죠. 음악의 황홀경(ecxtasy)을 느끼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대책 없이 행복해서 눈물이 나는 지점입니다. 저는 이런 연주를 최고로 칩니다. 아무리 초연 공연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10. 합창 지휘는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고 지휘 철학은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음악가(사람)은 누구이고 그 영향은 무엇인지 끝으로 듣고 싶습니다.

합창은 <나는 너다>로 시작해서 <나는 나다>를 깨달아가는 예술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나>와 <너>가 섞여 <우리>가 되지만 결코 각자의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나>로 존재하는 경지 말입니다. 그런 경지를 만들고 합창을 통해 자연(우주,신)의 소리를 세상에 외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지휘자라는 생각입니다. 자연의 음악을 짓고 배고픈 영혼들과 사랑을 나누는 일, 천국을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만들어 가는 사람이 지휘자라고 정의 하고 싶습니다.

또한 지휘자는 연극배우, 무당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비워 음악(배역, 타인의 영)을 담아내고 표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거든요. 연극배우라는 확신은 오래전에 들었고 무당이라는 개념은 좀 긴가민가했는데 시인 김지하에게 ‘ 지휘자는 무당 아니냐?’란 질문을 했고 그분 대답은 ‘ 정확하게 맟다,’라고 하시더군요. 많은 지휘자들이 무당이라고 하면 다 싫어 할 것입니다만 싫든 좋던 무당의 역할을 하는 건 사실입니다. 다른 영혼의 목소리를 자신의 목소리로 내어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해주고 평안을 주는 일이거든요. 저는 이왕이면 음악의 좋은 무당이 되고 싶었어요. 더구나 음악가는 자신이 받은 재능을 베풀 수 있고 우주의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성직자나 의사보다도 훌륭한 직업이라는 생각입니다. 아름다움을 만들고 나누는 사람, 사랑으로 위로하는 지휘자로 말이죠. 이 정도는 되어야 어려운 지휘자를 해봄직 하지 않겠어요?

제 음악과 인생에 영향을 가장 많이 준 사람은 작곡가 이건용 선생님과 음악학자 이강숙 선생님입니다. 이건용 선생님은 음악 대부분을 이강숙 선생님은 음악철학을 가르쳐 주셨죠. 지금 저의 음악이 존재하는 것은 이 두 분의 선생님 주변에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고 저의 존재가 이 두 분 덕분에 단단해질 수 있었습니다.

홍준철(1958~)
충남 대전 출생, 세종대학교, 동대학원 음악과 졸업 (M.M)
필리핀 아세아예전음악연구소 국제합창지휘 워크샾에 1993,1995년 참가
(독일 M. Berhmann 에게 배움)
송파구립, 광진구립, 간호대학, 신흥대학 합창단 지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대학로 교회, 수원교회, 강남교회 성가대 지휘
한국북소리합창단 창단 및 8년, 합창단 음악이있는마을 창단 및 22년 지휘
한국예술종합학교 발전재단 사무국장, 세종문화회관 재단이사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교회음악과 대우교수(합창지휘, 예전음악)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공통교과, 예술경영 출강
<합창지휘자를 위하여>, <합창단원을 위하여>, <나는 희망을 지휘 한다> 저자

현 아트실비아 재단이사,
전남 고흥으로 퇴촌하여 낙촌당(樂村堂)에서 음악에 관한 글 농사 전념